윤한봉

2007년 6월 26일, 1980년 5·18 광주 민중항쟁 최후의 수배자이자 진보적인 코리안 아메리칸 풀뿌리 운동의 창시자로 알려진 윤한봉 선생은 향년 58세를 일기로 삶을 마쳤습니다. 윤한봉 선생은 날카로운 분석력과 통찰력, 그리고 설득력을 지닌 운동가이자 지도자로, 해외 코리안 아메리칸 운동과 한국의 인권과 사회 정의 운동을 이끈 점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윤한봉 선생은 로스 앤젤레스 및 미 전역의 많은 코리안 아메리칸 청년들에게 도전의식을 심어주고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그들이 조직, 교육, 운동의 건설을 통해 그들의 열정과 부당한 현실인식을 실천에 옮기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청년 활동가들과의 학습 때마다, 항상 지역적 차원, 전국적 차원, 국제적 차원에서의 폭넓고 정확한 정세분석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학습을 통해, 코리안 아메리칸 커뮤니티가 우리 활동의 본거지이자 조직 강화의 핵심이어야 한다는 점과, 사회 정의라는 우리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다른 커뮤니티 단체들과 의미있는 연합체를 건설해야 한다는 점을 후배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를 본보기로, 우리는 정치적 신념을 우리의 일상에 결합시키는 운동의 생활화로 순수하고 참된 사회변화 활동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점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윤한봉 선생은 1948년 전남 강진에서 출생했습니다. 전남대 재학 중 "민주청년학생연합" 활동으로 제적, 1978년부터 이듬해까지 그 당시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운동(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차례 수감되었습니다. 다음 해인 1980년에는 5·18 광주민중항쟁 주동인물로 현상수배되었습니다. (5.18 광주민중항쟁은 한국 운동 역사에 있어, 한국 현대 민주주의 운동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으며, 국제적으로 군부독재를 종식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1981년 4월에는 40여 일 동안 무역선을 타고 미국으로 밀항하여 정치망명을 허가받았습니다.

그는 미국에 도착하여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 지지를 위한 해외 연대 운동 건설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결과, 1983년에 민족학교, 1984년에는 한국청년연합, 1987년에는 재미한겨례동포연합을 설립하였습니다. 특히, 한국청년연합은 전국적인 풀뿌리 커뮤니티 기반 조직 설립의 모태로, 이후 시카고 한인교육문화마당집, 뉴욕 청년학교,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의 설립에 주축 역할을 하였습니다.

1993년에는 오랜 군사 독재 정권을 마무리 한 후 문민정부가 들어섰고, 그 해 5월, 윤한봉 선생은 12년 간의 미국 정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영구 귀국하였습니다. 귀국 이후 그는 민족미래연구소(한국 미래에 대한 분석 연구와 계획 수립 기관)를 설립하였고, 아시아 태평양 전역에 민주주의와 인권 보호의 정신을 물려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5.18 기념재단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반대 국민연대"의 상임공동대표를 맡았고, 2004년에는 5.18 광주민중항쟁의 풀뿌리 지도자들을 기리는 "들불 열사 기념사업회"의 초대 이사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젊은 시절, 윤한봉 선생은 정부의 억압에 맞서는 활동으로 인해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15년 동안 폐기종으로 투병하였고, 2007년 6월 23일에는 폐이식 수술 을 받았으며, 수술 3일 후 사망하였습니다. 윤한봉 선생의 유족으로는 전 한국청년연합 회원이자, 민족학교의 총무로 재직했던 부인 신소하씨가 있습니다.

참고